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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공간

중세 음악

서양 음악의 역사를 살펴본다면 그것은 다성(polyphony)음악의 발달사라고 해도 그리 틀리지 않을 것이다 즉 서양 음악의 최초의 형태는 하나의 선율로 이루어진 단선율(Monophony)이었는데, 그기존의 단선율이 두 개 이상의 복선율로 바뀌게 되는 과정을 서술한 것이다. 사실 지금 우리가 알고 있는 소위 클래식 음악이란 모두 여러개의 성부를 가진 음악이기 때문에 처음 대하는 감상자들은 서양 음악이 본래부터 여러 성부를 가진 음악(다성음악)이라고 착각할수도 있다. 그러나 서양음악도 처음에는 하나의 선율로만 이루어진 단선율의 음악 이라는 것을 기억해야만 하고 , 무수한 변화를 거쳐 오늘날의 형태에 이르렀다는 것을 명심해야한다, 이렇게 단선률이 복선률로 바뀌게 된 첫 시기가 바로 9세기 중엽이다. 따라서 약 9세기 중엽까지는 단선율이 지배하던 시대이다 물론 9세기 이후에도 단선율 음악은 계속 독자적인 발전을 보여왔지만 이전과 같은 중요성은 없었던 것이다. 이렇게 단선율이 지배하던 시대를 로마네스크 시대라 한다. 로마네스크 시대의 단선률 음악은 교회에 의해 지배를 받게 되었는데 그래서 가사도 종교적 성격을 띤 라틴어 로 되어 있으며, 물질숭배 사상을 배제하던 교회에서는 물질로 만들어진 악기 같은 것은 용납될 수 없었기 때문에 가사 붙은 성악음악만이 존재했다. 음악의 존재 이유를 심미적 가치에서 찾았던 것이 아니라 하나님을 찬양하는 신앙적 가치에서 찾았던 것이다. 따라서 음악 그 자체 보다는 교회의 예배의식이 더 중요했으며, 의식의 필요부분 에 사용하기만 하면 그만이었던 것이다. 단선율 음악에는 보통 다섯가지의 종류가 있다. 콘스탄티누스 대제에 의한 동방교회의 설립 결과로 나왔다는 비잔틴 성가(Byzantine chant), 4세기경 이탈리아 밀라노의 주교 암브로시우스가 형태를 갖춘 암브로지안 성가 (Gallican chant), 서기 900년에 처음으로 나타나 스페인에서 성행한 모사라베 성가(Mozarabic chant), 그리고 이 시대의 음악에서 가장 중요시되며 또한 오늘날까지 자주 사용되는 그레고리오 성가(Gregorian chant)가 있다.
그레고리오 성가
그레고리오 성가는 순수한 음악임과 동시에 예배에 속하는 기능 음악이다. 이시대의 예배에는 두 가지 기본적이 형식이 있다. 그것은 성무일과(Office)와 미사(Mass)인데 성무일과는 하루에 정해진 시간에 정해진 순서대로 예식으로 모두 8개가 있다. 성무일과를 위한 그레고리오 성가는 안티포날레(Antiphonale) 또는 안티포날(Antipho nal) 이라고 하는 의전 책에 수록되어 있다. 미사는 성무일과 보다는 늦게 발달했지만 카톨릭 교회의 기본적인 예배로 'MASS'라는 말은 '가시오 집회는 끝났소(Ite missa est)'라는 의식을 끝내는 구절에서 유래 되었다. 미사에는 평소에 일반적으로 지켜지는 일상부 미사와 특별한 절기에 지켜지는 특별 미사가 있는데, 일상부 미사는 보통 키리에, 글로리아, 크레도, 상투스, 베네딕투스, 아뉴스 데이로 이루어진다. 그레고리오 성가의 음악적 특징은 앞서 말했듯이 하나의 선율로 이루어진 단선율 음악이다. 그리고 가사면에서 본다면 모두 라틴어로 쓰여져 있지만, 성서적 가사를 갖는 것과 비성서적 가사를 갖는 것으로 구분되며, 선율의 윤곽은 가사의 강세형을 반영하지만 선율을 특별한 감정 또는 서술의 효과를 적용시키려는 노력은 찾아볼 수 없다. 정확한 박자와 마디의 표시가 없어서 길게 낭송하는 듯이 보인다. 음계는 헥사코드(hexachord)라고 불리우는 6음 음계 체계로 이루어졌으며, 음의 기록은 네우마(neuma)라고 불리우는 기호들을 사용하여 표시하였는데, 보다 명확한 기보를 위해서 f음을 대표하는 붉은 선을 그어 그 아래 위에 기호들을 위치시켰고 조금 지나서 c'음을 표시 하기위한 노란선이 그어졌고, 11세기에 이르러 귀도 다레초에 의하여 4선 보표가 사용되게 되었다.
다성음악의 발달
다성음악의 발달은 오르가눔(Oraganum)의 탄생으로 시작된다. 서양음악 구조의 두가지 큰 법칙은 화성법과 대위법 인데, 9세기 중엽 서양음악에서 최초의 대위법이 나타나게 된 것이며, 대위법의 기초가 바로 오르가놈에서 비롯되었다 최초의 오르가눔은 기존 선율에 대해 5도위나 4도 아래로 중복되거나 옥타브로 한 번더 중복되는 현상을 말하는데, 이것을 평행오르가눔이라고 불렀다(이런 현상을 기존 선율의 종적 확장이라고 한다.) 그 후 11세기경 기존 선율은 저성부에 놓이고 대위선율은 상성부에 놓이게되는 자유 오르가눔과 12세기의 화려오르가눔이 탄생하게 된다. 이와관련된 악파가 생 마르샬(St. Martial)악파이며, 전기 고딕으로 분류되기도한다, 서양 예술사에 알려진 최초의 위대한 다성음악 작곡가는 12세기 말경 노트르담 교회의 합창단장이었던 레오냉이 있는데, 그는 후에 모테트의 모체 가 되는 디스칸투스 양식으로 된 클라우술라를 도입하였다. 그후 13세기경 중세의 이상적음향(Sound Ideal)인 3성부 음악을 이루는데 기여를 한 페로탱이 나타나 노트르담 성당을 중심으로 노트르담 악파를 형성한다.
아르스노바
13세기를 안정과 통일의 시대라고 한다면 14세기는 변화와 다양함의 시대라고 할 수 있다. 후기 고딕시대로 분류되는 14세기에는 이전의 신 중심적인 사고에서 탈피, 인간 이성과 성스러운 계시는 분리되어야 한다고 주장한다. 즉 인본주의(Humanism)가 발생하게 되는데, 이것은 후에 르네상스에 가장 중요한 영향을 미치게된다. 이러한 기운을 안고 14세기초 프랑스에서 그리고 조금 늦게 이탈리아에서 새로운 음악형태가 일어나는데 이것을 프랑스에서 그리고 조금 늦게 이탈리아에서 새로운 음악형태가 일어나는데 이것을 프랑스 작곡가이자 이론가인 필립 드비트리(PHILLIP PE DE VIRTY/1291 ~ 1361)의 논문 제목을 따서 아르스 노바(Ars nova/신예술)라고 불렀으며 이전시대를 아르스 안티카(Ars antiqua/구예술)라고 부르게 되었다. 이렇게 1300년경에 최초로 신음악이 탄생하게 되었는데, 이후 대략 300년의 터울로 신음악이 그것이다. 14세기에는 종교음악 작곡으로부터 세속음악 작곡으로 그 강조점이 크게 변하게 되었으며, 다양하고 자유스러운 리듬, 그리고 일정한 조의 중심을 향해 진해하는 화성감각이 자라나게 되었다, 즉 5도와 8도가 드물어지는 반면, '고정형식(Formes fixes)'이라고 불리우는 발라드(ballardes), 론도(rondeau), 비를레(virelais)가 발생한다. 이 모든 14세기의 특징을 창출한 가장 유명한 작곡가가 바로 기욤 드마쇼(Guillaume de Machaut)이다. 15세기 초 영국에서도 장조 조성으로 향하려는 경향을 보였는데 이 시기의 지도적인 작곡가로는 존 던스터블(John Dunstable)이 있다. 음악양식의 역사는 크게 보면 대위법적인 양식과 화성법적인 양식의 대립이라고 할 수 있다. 이렇게 볼때, 중세 말기 의 음악적인 양상은 대위법적 짜임새 보다는 화성법적 조직으로의 변화를 추구한다고 하겠다. 그리고 추상적이고 비감각적인 구조의 원리에 대한 관심으로부텨 서서히 음향의 즐거움 만을 찾게 되었다.

르네상스 음악

1450년부터 1600년대에 이르는 시기를 음악사적 '르네상스'라고 부른다. 이말은 중세 말에 대한 '고딕'이나 다음장에서 언급될 '바로크'와 같이 미술사에서 빌려온 용어이다. 이 말의 문자대로의 의미는 '재탄생'으로서, 고대 문화의 부흥을 뜻하는 말이었다. 미술등 문예의 경우에는 많은 부활을 보였지만 음악에서는 이와 같은 의미의 '재탄생'은 없었다. 그러나 넓은 의미의 르네상스는 인간정신의 재탄생으로서 인본주의적 예술창작 태도, 조화 및 비례의 중시, 합리적인 기법의 탐구, 명확한 표현 등이 그 중심 내용이므로 음악에서의 이런 양식상의 특징이 확연히 나타나는 점을 지적할수 있다. 즉, 음연이 현저히 넓어지고, 새로운 음공간이 개척 된 것은 회화에 있어서 원근법과 비길 수 있으며, 악보 인쇄술의 발명과, 정량 기보법의 보급은 르네상스 의 과학정신과 관련된다. 이 시기에 있어서 음악은 그 어떤 시기보다도 많은 음악이 작곡되고 연주되어 음악가들은 전보다 높은 명성 을 얻었으며, 마침내 '위대한 작곡가'라는 개념이 처음으로 등장하게된다. 또한 음악에 관한 새로운 종류의 이론 서적이 나타나기 시작했는데, 르네상스 기간에 있어서 음악의 성장에 가장 큰 공로 중 하나는 바로 음악 인쇄의 시작일 것이다. 또한 16세기 초에는 음악을 작곡하는 방법에 변화가 이루어졌는데, 즉 지금까지는 한 성부씩 작곡하여 왔 으나 여러 성부를 하나의 전체로서 동시에 생각해 내고 쓰기 시작하여 총보(SCORE)를 사용하기 시작한것 이다. 중세의 이상적인 음향은 3성부의 대조되는 음색으로 이루어진 반면, 르네상스의 이상적인 음향은 같은 종류 의 비슷한 음색과 동등한 중요성을 갖는 넷 이상의 성부로 이루어진 무반주 성악 앙상블 즉, 아카펠라(ACA PELLA)이었다. 이시대는 모방 기법으 체계적 고용으로 각 성부들은 모방 대위법의 짜임새 안에서 동등하게 음악적 동기들을 소개한다는 점에서 각 성부들은 동등한 중요성을 가지게 된 것이다. 음악은 가사에 더욱 밀착되어 가사의 의미를 음으로 표현하고자 하는 음화(Tone painting) 즉, 무지카 레세 르바타(Musica reservata)라고 부르는 형식이 되거나, 가사에서 더욱 독립되어 기악 음악을 대두시켰다. 이 시대의 최초로 언급해야 될 작곡가는 플랑드로 악파의 거장인 요하네스 옥케켐(Ockeghem)으로 창작에 관계되는 여러가지 새로운 아이디어를 고안해냈다. 이외에도 무지카 레세르바타의 선구적 역활을 한 조스켕 데 프레, 종교음악의 대가 팔레스트리나, 오를란도 디라소, 그리고 영국이 낳은 최고의 음악가인 월리암 버드 바로크의 징검다리 역활을 한 베니스 악파의 거장 조반니 가브리엘리 등이 대표적인 작곡가들이다. 그 중 조스캥 데 프레는 모든 시대를 통틀어 가장 위대했던 사람들 중의 하나라고 불려진다.

바로크 음악

14세기 초엽의 최초의 신음악이라고 불리우는 아르스 노바의 탄생이후 두번째의 신음악이 탄생 되었다. 그것이 바로크(Baroque) 음악이다. '바로크'라는 용어는 16세기 말경부터 18세기 중엽까지의 보통 1600 ~ 1750 년까지의 역사적 기간과, 그시대의 음악 양식을 지칭하는 용어이다. 그러나 다른시대와 마찬가지로 바로크 시대의 경계는 뚜렷하지 않다. 역사가들이 1600 ~ 1750년의 음악에 바로크라는 이름을 붙여 준 것은 그 음악 이 당대의 건축, 회화, 문학, 나아가서 자연 철학이나 철학과 어느정도 비슷하기 때문이다. 이 시기 뿐아니라 어떤 시기에 생산된 음악이든지 간에 당대의 다른 예술에서 표현된 경향, 관념들을 그 나름대로 반영한다고 볼수 있다. 바로크라는 말은 '불규칙적인 모형'을 뜻하는 포르투칼어에서 유래된 것으로 이 말은 비정상적인, 기교만 과장 된, 감각이 나쁜, 괴상한 등의 헐뜯는 뜻으로 오랫동안 사용되어 왔다. 그러나 음악에서는 이러한 의미로 해석 해서는 안된다, 다만 이전 시대의 음악과 견주어 볼 때 새로운 양식이 그들에게 생소하게 보여졌을 것이라는 의미로 바로크를 이해해야한다.
단선음악(monody)
당대의 사람들에게 이상하게 보인 것이 무엇인가? 9세기에서 16세기까지 지배해 오던 음악적 통념은 대부분의 경우 다성음악이었다. 즉 몇개의 성부가 얽혀서 이루는 복잡한 음악이었다. 그러나 17세기에 들어오면서 음악은 여러 성부가 아닌 단성으로 이루어진 독창 양식을 창출한 것이다. 이것을 단선음악(Monody)이라 부르는데, 이 양식은 르네상스인들이 그리이스 고전에 대한 존경심의 부산물로 생겨난 것이다. 이상적인 그리이스의 모방은 반주를 없애고 독창 성부만 남기는 것이지만 이 단선음악은 독창과 반주의 선율이 뚜렷이 구분되어 있으며, 반주 는 극히 축소되어 몇 개의 간단한 수직화음으로 압축되었다. 그리하여 이 단선 음악이 급기야는 오페라를 탄생시 키게되는 기초가 된 것이다. 오페라는 16세기 말경 이탈리아 프로렌스의 일단의 음악가와 시인들의 모임인 카메라타(Florentine Camerata) 에서 발생하였는데, 이 집단의 최초의 대변자는 갈릴레이(Vincenzo Galilei)로 유명한 천문학자의 아버지이다. 그는 음악에 조예가 깊어 스스로 단테의 '지옥'에 비올반주에 의한 테너 독창곡을 쓰기도 하였다. 단선음악의 지도자로는 페리(Jacopy Peri, 1561 ~ 1633)와 카치니(Giulio Caccini, 1546경 ~ 1618)가 있었으며, 오페라 라고 불릴 수 있는 최초의 것으로는 리누치니(Ottavio Rinuccini)의 대본을 작곡한 페리의 다프네(Dafne)이다. 바로크 음악은 이탈리아의 이념에 의해 지배되었다. 즉 17세기에는 플로렌스와 베니스가, 18세기에는 나폴리가 음악적으로 지도적인 도시였다. 또한 로마는 종교음악 분야에서 계속적으로 영향력을 행사하였으며, 17세기 한 동안은 오페라와 칸타타 분야에서 중요한 역활을 하였다. 모든 바로크 작곡가들에게 공통된 특징은 음악을 사용하여 이념과 감정을 표현 또는 재현시키려 노력하였다는 것 이다. 이것을 특정 감정 표상법(Doctrine of affection)이라 부르는데, 이것은 르네상스의 무지카 레세르바타 (Musica reservata)를 계승한 것이라고 보여진다. 또한 음악은 '분명한 이념'을 표현한다고 생각하였는데, 이것 은 17세기 철학을 지배하였던 데카르트의 영향 때문이었다.
숫자붙은 베이스
위에서 언급했듯이 르네상스가 이상으로 하였던 기본적인 음향은 독립된 여러 성부들이 이루는 다성음악이었다. 그러나 바로크의 이상적인 음악(SOUND IDEAL)은 튼튼한 베이스 위에 흐르는 선율이 붙은 것으로써, 이 베이스와 자연스러운 화성을 이루는 것이었다. 이렇게 베이스를 강조한 형태를 두고 통주 저음(Through bass), 또는 지속 저음(Basso continuo)이라 불렀다. 또한 베이스 음표 아래나 위에 화성의 성격을 숫자나 기호로 지시하기 때문에 숫자 붙은 베이스(Figured Bass)라고도 한다. 따라서 이 지속 저음은 음악이 대위법에서 화성음악으로, 선적 선율 구조에서 화성적 구조로 넘어가는 다리 역활을 하였던 것이다. 이 시대에 있어서는 교회의 역활이 전 시대보다 비교적 덜 중요하게 된 반면, 귀족 또는 종교적 후원자들이 음악활동 을 지원하여 여러개의 아카데미가 형성된다. 특히 이 시기에는 비록 널리 알려 지지는 않았지만, 지금과 같이 입장료 를 받고 연주회를 공개하는 상업적인 음악회가 1672년 영국에서 시작되어 독일과 프랑스에서도 시도되는데, 본격적 것은 18세기 중엽 이후부터이다. 역시 성악 부분에 여전히 많은 관심을 보이는데, 오페라 이외에도 오라토리오, 칸타타등이 발전을 보였다, 또한 우리가 알고 있는 기악음악들의 많은 형식인 협주곡, 모음곡,소나타 등이 바로크 시대에 완성되게 되었다. 이 시기의 작곡가로는 오페라 작곡가인 클라우디오 몬테베르디, 17세기 중엽의 가장 위대했던 독일 작곡가인 하이리히 쉬츠, 장밥티스트 륄리, 코렐리, 존 블라우,핸리 퍼셀, 안토니오 비발디 등이 있으며, 이러한 형시의 완성자는 바로 잘 알려진 헨델(1685 ~ 1759) 과 바흐(1685 ~ 1750)이다.

고전주의 음악

고전주의 시대는 보통 J.S. 바흐가 죽은 해인 1750년부터 1800년대의 중반으로 보고 있다. 고전주의와 낭만 주의 경계가 그렇게 쉽게 구별되지 않기 때문에 몇가지 견해가 있다. 왜냐하면 낭만 음악의 거장인 슈만과 쇼팽이 1810년에 태어났기 때문에 이 해를 시점으로 보자는 견해와 베토벤이 죽은 1827년까지를 고전주의 시대로 보자는 견해가 있기 때문이다. 하여튼 고전주의 시대는 하이든, 모차르트, 베토벤 등 이른바 '빈 악파' 의 세 악성들이 활약한 화려한 시대임은 틀림없을 것이다. 18세기는 이른바 '계몽주의'가 풍미한 시대로서 상식이 통하는 사회, 그리고 개인의 자유와 평등을 지향하는 사회를 추구하였다. 이렇게 개인이 자신의 내면 생활에서 마음껏 즐기는 것이 계몽주의의 특징인 현상이었다 고전주의 음악에 막대한 영향을 미친 18세기 사상은 다음과 같이 네가지로 살펴볼 수 있다. 첫째로 18세기는 범세기적인 시대였다. 즉 한나라에서만 좋은 음악으로 인정되는데 그치지않고, 많은 민족에게서 이해되는 음악 이 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그래서 낭만 시대와 더불어 이 시대가 '공통관습시대'라고 불리우는 것이다. 둘째로, 이 시대는 인본주의를 추구한 시대였다. 이러한 이상들은 '프리메이슨 운동'으로 구체화돠어 전유럽으로 급속히 퍼져 나갔으며, 모차르트도 여기의 열렬한 회원이었다. 셋째로는 중산층이 영향력 있는 위치로 발돋움하면서 예술과 학문의 대중화 과정을 보였다. 소수의 집단보다는 일반 대중을 의식하여 모든것이 이루어진 것이다. 음악에서도 후원 조직은 쇠퇴하고 있었고, 근대적인 음악청중이 발생되고 있었다. 대중을 위한 악보 인쇄가 엄청나게 증가하였으며, 음악 저널리즘이 시작되었다. 또한 음악,뉴스,비평,잡지들이 탄생되었으며, 첫 음악 사들이 서술되었다. 마지막으로 계몽주의 시대는 산문의 시대였다. 시적이기보다는 논리적인 이 시대는 바로크 의 신빙성, 묵직함, 거창함 등을 좋아하지 않았다. 음악의 임무는 다른 예술처럼 자연을 모방하고 음향으로 현실 의 모양을 듣는 사람에게 기분좋게 제공하는 것이라고 생각했다. "자연으로 돌아가라."고 외친 루소는 실제로 이 분야의 뛰어난 작곡가이기도 하였다. 따라서 음악은 몇 안 되는 학식있는 사람들만이 알아들을 수 있는 현묘한 대위법적 복잡성을 피해야 했으며, 듣기 좋은 음향들의 연속적인 조합으로써 사람들을 즐겁게 해 주는 예술이어야 했던 것이다. 왜 모차르트의 음악이 쉽게 그리고 편하게 들리는 것은 바로 이러한 사상적인 이유로서 작곡되었기 때문이었던 것이다. 이러한 취향에 따라 음악은 간결한, 그리고 선명하면서도 솔직한 선율을 택하게 되었으며, 이것을 화성적인 반주로 뒷받침하는 단성음악(Homophony)으로 전환하게 되었다. 또한 규칙적인 형식미를 추구하게 되었는데 그 형식도 간결하고 솔직한 것을 좋아하게 되었고 모든 형식이 어떤 일정한 주제를 설정하고 통일을 유지하는 범주에서 변화 발전시켜 가는 논리성을 갖게 되었다. 이것의 대표적인 형식이 바로 소나타 형식인 것이다.이러한 고전주의(Class icism)양식의 기초는 바흐의 아들들과 요한 슈타미츠(1717 ~ 1757)를 대표로 하는 독일 만하임 악파의 작곡가들이 며, 더욱발전시킨 사람은 글룩, 하이든, 모차르트, 베토벤등 이른바 빈 악파라고 하는 대가들이다. 그러나 베토벤의 말년의 작품들에서는 이러한 형식적이고 고전적인 균형감이 깨어져 주관적이고 낭만적인 경향이 드러나고 있음을 기억해야 한다. 이 시대의 커다란 업적은 화성 음악의 확립, 소나타 형식의 확립과 발전, 기악 음악의 확립과 발전 즉 교향곡, 근대적 협주곡,현악 4중주, 피아노 3중주 등의 기악 형식과 연주 형식의 확립 등이다.

낭만주의 음악

낭만주의(Romanticism)는 일반적으로 19세기의 음악을 지배하는 기본적 이념으로 알려져 있지만 사실, 광의의 의미에서 낭만 예술이란 어떠한 시기의 현상이 아니고 여러형태로 여러 시기에 나타나는 것이다, 즉 아르스 노바는 아르스 안티카와 비교하자면 낭만적인 것으로 여겨지고, 르네상스와 비교하자면 바로크가, 또한 19세기는 18세기의 고전주의와 비교하자면 낭만주의적인 것이다. 이렇게 낭만예술은 현실의 시간과 기회를 초월하여 영원한 것을 잡으려 하고 세계의 폭을 넓히고 우주를 통해서 밖으로 나아가려고 한다. 19세기의 낭만주의 음악은 고전주의 음악 이상의 질서, 균형, 조절등에 대립하여 자유, 열정, 그리고 얻어질 수 없는 것에 대한 끊임없는 추구를 즐겨한다. 그리고 고전적인 분명성은 의도적인 애매성과 대치되고 암시에 의한 언급,은유,혹은 상징에 의해 대치되는 것이다. 또한 시나 회화 등 음악 외적인 분야로 부터의 새로운 자극을 희구 하는 경향을 갖게 되었다. 따라서 음악의 기법에 있어서도 새로운 개혁을 갖게 되어 고전 음악 시대의 최고의 이상 형식이었던 소나타을 대담하게 변형 또는 포기하고, 그 대신 자유롭고 유동적인 형식을 사용하게 되었다. 그리고 선율은 고전 음악 시대처럼 마디 수가 배수로 구성되는 규칙적인 것이 아니라, 불규칙적인 것이 많아지고 당김음 이라든가 잇단 음표 등을 자주 사용해서 다채로운 변화와 표현의 폭을 넓히고, 그 음역도 확대하고 때로는 비성악 음정도 서슴치 않고 사용하게 되었다. 또한 복잡한 리듬, 불협화음, 새로운 음색 등을 추구하며 대대적인 관현악 편성으로 압도적인 음향을 추구하게 되었다. 또한 낭만주의 음악의 특징 중 하나는 소곡의 애용에 있다. 유별나게 이 시대는 피아노를 위한 소곡이 많은 애호를 받게 되어 수 많은 명곡이 탄생하게 되었다. 야상곡,전주곡,연습곡,즉흥곡,폴로네즈,마주르카 등이 이런 부류에 속한다. 낭만 음악의 징조는 베토벤의 후기 작품에서 나타났다고 하나, 옳은 의미로 낭만음악의 첫 대가는 베버와 슈베르트 라고 할 수 있다. 그후 19세기 중엽에 들어서면서 맨델스존, 슈만, 쇼팽 등이 나타나 낭만주의 음악은 더욱 새로운 방향으로 나타났는데 이들은 고전적인 수법이나 내용을 완전히 버리고 특수 감정의 표현이라든가, 자연이나 인생 등 음악 이외의 자극을 좋아하고 소품에 대한 기호, 그리고 내용 감정의 정열에 취향을 표시하게 되었는데 이러한 음악을 중기 낭만주의 음악이라고 한다. 한편에서는 파가니니의 자극으로 새로운 관능적인 음악이 나오고, 베를리 오즈등에 의한 새로운 감각의 피아노 음악과 관현악이 나왔눈가 하면 리스트에 의하여 고전적인 교향곡을 버리고 교향시가 새로이 등장하였다. 또한 바그너에 의하여 전통적인 오페라를 버리고 합리적인 악극이 창조 되었는데 철저한 반음계법을 추구하는 '트리스탄과 이졸데'에서는 서서히 조성이 붕괴되는 모습이 드러나고 있다. 1900년을 전후하여 브루크너, 말러, 볼프, 리하르트 수트라우스등이 바그너를 신봉하여 나갔다. 이러한 이상주의적 감정에서 후기낭만주의 음악이 형성되었다. 그러나 브람스를 비롯한 일련의 신고전주의 작곡가들리 등장하는 한편, 러시아의 국민음악 5인조(보로딘,큐이, 무소르그스키, 발라키레프, 림스키 코르사코프)를 비롯하여 노르웨이의 그리그, 핀란드 의 시벨리우스, 보헤미아의 스메타나, 드보르자크등이 민족주의를 표방하고 나섰다. 후기 낭만주의 특징의 하나는 오페라의 전통을 발전시킨 비제, 이탈리아의 롯시니, 도니젯티, 벨리니로 이어지는 벨칸토 오페라의 완성을 비롯하여 베르디, 마스카니,레온카발로와 더불어 극적이고 박력있는 오페라를 작곡하여 근대 오페라의 금자탑을 쌓아올린 푸치니 등이 낭만주의적인 관현악의 색채와 극적인 표현을 추구하면서 나아간다.

20C 음악

20세기는 음악 역사상 세번째의 신음악(New Music)이 탄생되었다. 즉 14세기의 아르스 노바, 17세기의 바로크, 그리고 20세기에 바로 세 번째의 신음악이 생겨났는데, 보통 근대음악, 또는 현대음악이라 불리고 있다. 그러나 때에 따라서는 근대음악을 현대음악보다 앞선 시기의 것으로 보는 경우도 있다. 20세기의 음악은 1, 2차 세계대전을 전후로 하여 대략 세 시기로 나눠진다. 그 첫 시기가 20세기 초부터 제 1차 세계대전 까지로 낭만주의가 해체된다는 1890년부터 1917년 사이가 그것이다. 이 시기에 나타난 경향은 보다 개성화된 후기 낭만주의 성격의 것으로서, 순간적인 이상을 정묘한 음색(음화)에 고정시키려는 드뷔시의 인상주의(Impressianism), 원시적 생명력의 동경으로 나타난 스트라빈스키, 바르코크, 프로코피에프 등의 원시주의((Primitivism) 그리고 예술감각과 종교체험의 일치를 꾀한 스크라빈의 신비주의(Mysticism), 제1차세계대전전 부터 대전중까지에 걸쳐 유행했던 소음(타)악기로만 구성된 미래주의(Futurism)음악이 나 타났다. 두번째의 시기는 1,2차 세계대전의 사이로서,1918년부터 1945년 까지를 가리킨다. 첫번째로 나타난 것은 낭만파 에 대한 반동으로 생겨난 부조니, 힌데미트 등의 신고전주의(Neo-classicism)이다. 또한 19세기 후반부터 시작된 반음계주의(Cromaticism)의 증대로 점차 조성이 파괴되어 무조음악(Atonal Music)이 나타났으며, 쇤베르크는 무조성을 지켜가면서 대규모의 악곡 구성을 가능케하는 기법을 추구, 마침내(다만 상호관계에 형성 되는) 12음에 의한 작곡기법을 창시하였고 베베른과 베르크는 이를 더욱 발전시켰다. 그후 바르토크는 수치관념 을 철저히 하여 보다 다면적이고 독자적인 음악기법을 확립하였으며, 메시앙도 신비주의의 영향을 받아 자기의 독자적인 체계를 확립하였다. 소련에서는 당의 정치적 요청에 의하여 서구적인 모더니즘을 일체 불식해 버린다는 방침으로 신고전주의적 경향이 가장 완성된 모습으로 나타나 19세기의 작곡기법으로서의 회귀를 보인다. 프로코 피에프,쇼스타코비치, 하차두리안, 카발레프스키 등이 그들이다. 세번째의 시기는 제2차 세계대전이 끝난 1945년 이후를 말한다. 쇤베르크가 이룩한 12음기법은 2차대전의 종료와 더불어 젊은 세대의 습작으로서 또는 후진국 작곡가들에 위해 채택되어진다. 또한 더 나아가서는 쇤베르크가 취한 음 높이 뿐아니라 리듬, 강약 음색등도 순열적인 사용에 의해 정밀한 음악 감각을 표현하는 음열주의가 대두된다. 그외에 쇄이퍼(Pierre Schaeffer)에 의해 고안된 구체음악(Concerete Music), 이것은 악기나 성대에서 제조되는 소리만을 음악의 재료로 사용할 것이 아니라 녹음기에 녹음이 된 다양한 소리를 음악의 재료로 사용하자는 것이다. 또한 전자 기기의 발달로 전자음악(Electronic Music)이 2차대전이후부터 아주 중요한 역활을 하게된다.즉 전자가기적 힘으로 소리를 제작, 변형, 녹음, 재생시켜 음악을 만드는 것이다. 이러한 음악이 탄생된 배경은 새로운 음악적 사고와 그사고 에 맞는 음악적 재료를 자유롭게 만들어야 된다는 생각에서 비롯되었다고 할 수 있는데, 1950년 부터 서독 쾰른의 방송국 스튜디오에서 실험적으로 시작하여 1953년 창시자 아이메르트(H. Eimert)에 의하여 '음향습작 1,2'라는 곡이 되었다. 이것은 슈톡하우젠에 의하여 더욱 발전을 보게 되었다. 2차 대전 이후의 특징 중의 하나는 불확정성 음악으로 연주 결과를 연주전에 예측할 수 없는 음악적 재료가 음악 속에 투입되어 있는 것으로써, 우연서의 음악 Chance Music) 이라고도 불리우는 이것은 존 케이지를 선도로 하고 있다. 이렇게 20세기에는 음악 예술의 새로운 가능성을 추구하는 여러 움직임들이 나타나고 있지만 이러한 음악적 조류에 관하 여는 아직도 찬반이 엇갈리고 있다. 즉 이논쟁은 20세기 현대 음악과 인간과의 관계인데, 반대적 입장은 현대음악이 인간 의 지각적 한계를 넘어선다는 것이다. 하여튼 앞으로 세계가 여러모습으로 변화할 것임에 틀림없듯이 음악도 변화할 것임은 틀림없으며, 그것이 어떻든 간에 음악은 인간에게 삶의 여유를 가져다 주어야 할것이다.
최근 업데이트 일시 : 2023/09/20 16:20:5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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